20061101.jpg 20061102.jpg 20061103.jpg 20061104.jpg 20061105.jpg 20061106.jpg 20061107.jpg


  이 경 화
 ‘북경 올림픽’에 화려한 색채를 더하기를 바라며

  이경화 소개:
  이경화(Lee Kyung-Hwa. Ph. D) 이학박사. 1955년 7월 18일 한국 출생.
  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 이사장, 서울무용아카데미 이사, 서울예술고등학교 동창회 이사, 한ㆍ러 극동협회 이사, 사단법인 중국정경문화연구원 이사, 성남시 문화의집 운영위원, 한국대통령헌법자문기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이수자, 중국 중앙민족대학 객좌교수, 북경무용대학 객좌교수. 전 명지대학교 예술체육대학  겸임교수, 한국 국립무용단 단원, 이화여자대학교․한양대학교․단국대학교 외래교수.

  주요학력:
  1974년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1978년 이화여자대학교 체육대학 무용학과 졸업
  1982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연구과정 졸업
  1998년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이학박사)

  주요 안무경력:
  2006. 1. 07. 중앙민족대학(중국) 특별초청 공연 예술감독 및 단장
  2005. 5. 11. 제51회 경기도 전국체육대회 개막식 식전 공개행사 총괄 안무 및 지도
  2002. 5. 30. 2002 FIFA WORLD CUP KOREA & JAPAN(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공개행사 ‘누리북’ 안무 및 지도(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세계 57개국 순회공연
  1988, 10.02. ‘88 서울 올림픽 폐막식 공개행사 ‘등불의 안녕’ 안무 및 지도
  1986. 9. 20. ‘86 서울 아시안게임 폐막식 ‘봄처녀’ 안무 및 지도

 

 주요 수상경력
  2006년 대통령상 수상(제3439호 韓國舞踊 名舞 -소고춤)
  2003년 국무 총리상 수상(제11754호 해외홍보 유공)
  2003년 서울예술고등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예고를 빛낸 얼굴들’ 수상
  2000년 France ‘ Forkloriades International de Dijion 세계 민속무용·음악 경연대회’ 참가국 45개국 중 ‘은상’수상
  1997년 진주개천예술제 특장 부문 ‘살풀이’ 최우수상 수상
  1989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폐막식 안무: 체육부 장관 표창장 수상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식 안무: 체육부 장관 표창장 수상
  1979년 무용한국사 주최 제1회 전국 신인 무용 대회 ‘금상’수상

  금년 발간된 제7호 “인재ㆍ재복” 잡지를 통해서 본 기자는 “이영주-6백 년 전 선조의 당부를 잊지 않고 실행에 옮기다”라는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었다. 중한우의의 가교 설계사, 중한 무역협력의 추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 한중우호협회 부회장, 한국 중국유학박사협회 회장으로서 중국인모두가 잘 알고 있는 ‘중국통’인 한국의 친구 이영주 박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동료 기자들과 친구들은 본 기자에게 ‘중국통’의 부인을 기사화한다면 과연 원고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본 기자는 독자들이 원하는 깊이 있는 기사를 위하여, 또한 동료 그리고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황금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여 당시 서울에 있던 이영주 박사와 약속을 하여 10월 15일 북경에서 만나 동료기자와 함께 중앙민족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중국통’의 부인 이경화 여사를 만나기로 하였다.
  본 기자가 방문의 취지를 설명하자 이경화 박사는 “기자님께서 너무 편애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영주 박사께서 중한 양국의 우호협력증진을 위한 민간대사라면 저는 민간대사의 부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더 나아가 제가 갖고 있는 저만의 재능을 발휘하여 북경 올림픽이 더욱 밝고 아름다운 축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색채를 더하는 역할을 다 하고자 노력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표현에 기자를 비롯한 이영주 박사 역시 모두 즐겁게 환소할 수 있었다.
  기자의 방문취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의 몸에는 하나의 샘터가 존재하여, 부단한 생명과 활력 그리고 애정이 분출되어진다. 만약 우리 몸에 존재하는 샘터가 순리적으로 잘 흐를 수 있도록 그 물길을 헤쳐주지 않는다면 주변의 토지마저도 모두 쓸모없는 늪지대로 변해버릴 것이다.                                              
                                                  -  马克 拉瑟福德 -

  이경화 박사는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전문 무용가이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및 2002년 한일 월드컵 개ㆍ폐막식 등 3대 국제행사의 안무 및 지도를 모두 맡았던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는 차원 높은 예술성과 지도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일종의 천부적 소질이 아닐까 한다. 듣기로 그녀는 3살이 되었을 때부터 음악소리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율동을 하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성장을 하면서 그녀의 춤에 대한 천부적 소질과 능력은 더욱 돋보였다. 당시 한국의 여건과 정서에 비추어 볼 때 무용인의 사회지위는 높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부모는 자신의 딸이 학자가 되기를 희망하셨다. 당연히 무용을 배우는 것에는 반대를 하셨다. 그러나 그녀의 춤에 대한 남다른 열정에 감복하여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에서 한국무용으로 유명한 대가들을 찾아 그녀에게 무용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시기도 하셨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연히 맞이하는 여러 변화요인들의 영향을 받을 때가 많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인생 전반기를 회고해 보면 그러한 보편적 상식은 별로 적용 될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녀의 인생여정은 잘 펼쳐진 신작로였으며, 이러한 인생여정은 그녀의 내면적 감성과 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용을 배운 것은 천성에 의한 것이다. 한국 전통무용과의 인연 역시 천성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어릴 적 발레를 가르치는 교사가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신체조건 등을 관찰하고 발레에 매우 적합하다고 판단,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발레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발레를 선택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매번 발레를 연습하고 나면 그녀의 내면에는 왠지 복잡한 그 무엇인가가 생겼으며, 불안한 마음은 쉽게 안정되지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한국 전통춤을 추고 나면 그녀의 마음은 이내 평안해 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경화는 결국 전통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선택된 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이전, 이경화의 춤은 그녀가 기본적으로 지닌 재능일 뿐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춤은 일생의 전업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춤 이외의 다른 길은 생각하지 않았다. 15세 때 그녀는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서울예술고등학교는 한국의 예술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고등교육기관이다. 예술을 전공하고 싶은 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학교의 입학은 무용을 배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셈이다. 이 때 부터 그녀는 한국 최고의 수준인 무용을 배우고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입지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학교 교육은 엄격했으나 그녀에게 있어서 철저한 무용교육은 본인이 원하여 선택한 길이었고, 그 속에서 재능을 키우는 일이었기에 힘들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생활의 대부분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자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질 뿐이었다. 소녀 이경화의 고등학교 생활은 바로 그렇게 지나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 진학하였다. 기자는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하였다는 자부심을 그녀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녀에 의하면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는 전국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학과로서 입학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으며, 경쟁률이 당시 치열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큰 차이점이 있었다면 고등학교 때에는 춤을 배우는 일에 치중한 생활이었지만 대학에서는 춤을 배우는 것 이외에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이 더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춤을 가르치는 것과 자신이 춤을 추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로써 전자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녀는 사람들이 흠모하는 한국 국립무용단의 단원이 되었다. 국립무용단은 한국 최고의 무용단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이다. 1979년 그녀는 ‘제1회 전국 신인 무용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또한 국립무용단에서 장기적으로 근무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용단 단원이 되었을 때 스스로에게 3년 동안만 근무하면서 경험을 쌓은 후 다른 길을 간다는 목표를 다짐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였던 다짐을 그녀는 지켰다. 1981년 그녀는 국립무용단을 떠나 모교로 돌아가 석사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석사 졸업 후, 그녀는 몇 몇 대학교의 출강하여 무용지도를 맡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녀를 아끼던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그녀에게 예술무용단을 창립하여 자신을 개발하고 무용재능을 더욱 키울 공간을 마련할 것 등을 권유하게 된다. 그녀 자신도 국립무용단에 재직 시 자신은 단지 단원의 한 사람으로서 정해진 일정과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여야만 한다는 엄연한 한계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한계를 넘어 서고자 하여 자유인이 되었으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체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1984년 그녀는 우리춤예술원(전 이경화 춤초롱무용단)을 창립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무대에서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게 된다. 당시 그녀는 겨우 29세였다.
  이경화의 표현에 의하면 무용은 중요한 표현수단으로서 음악과 미술, 문학, 조명 등을 종합한 예술이며, 동시에 반드시 극 등의 정서를 내포해야하는 일종의 무대표현예술이다. 따라서 무용은 연출구상과 무대대본을 필요로 하며, 작곡가는 극의 주제와 각 장의 규정된 정서에 의하여 작곡을 하여야 하고, 미술가는 내용과 극의 풍격에 의하여 배경과 색체, 복장 도구와 인물조형 등을 설계해야 하며, 지휘자는 음악과 연주단의 연출, 안무 및 지도자는 단원을 훈련시켜야 하는 등, 결국 이러한 요인들이 모두 모여 무대에서 종합적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무극(舞劇)은 여러 유형과 풍격을 지닌 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의 무용을 위주로 하는 것과 여러 유형의 무용을 동시에 중요시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국인은 대부분 TV에서 방영된 연속극 등을 통해서 한국을 이해하고 있다. 그녀는 한국 연속극은 널리 유행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전통적 무용은 오히려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현재 자국의 춤인 한국무용을 선호하여 배우고자 하는 한국무용 지망생들이 날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고, 한국 전통무용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도 갈수록 적어지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용 역시 영화나 연속극과 마찬가지로 문화를 재현하고 구현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녀가 원래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무용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사과정과 논문을 작성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었다. 그녀는 57개 국가를 다니면서 공연을 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경력을 보고 있자면 무용은 국경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녀와 그녀의 예술단은 끊임없이 세인들에게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 진정한 한국의 전통무용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다. 중국과 한국은 서로 가까운 나라고 남편 역시 중국통이라서 그녀는 자연히 중국과 가까이 할 기회가 많았다. 그녀는 지금 중앙민족대학 객좌교수로서 한국의 전통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방문취재 중 그녀는 기자에게 매우 전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바로무대 표현예술의 당대 형태변화와 분화(分化)에 관한 문제였다.
  그녀는 말하기를 당대의 무대표현예술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 다양한 개성의 존중이라는 환경변화에 의해서 과거와는 달리 극장 이외의 열린 표현공간으로, 작은 가무극장에서 규모가 큰 체육관과 같은 큰 장소로, 각자 다른 표현방식을 위하여 또 다른 다양한 관중에게 많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또 다른 방면으로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첨단 음향기기의 활용, 직접 녹음 등의 방법을 도입하는 등, 무대 표현예술 감상의 ‘간접화’와 동시에 무대예술을 감상하는 ‘비1차성’ 적인 특징 등을 실현하고 있다고 한다. 당대 무대 표현예술의 형태적 분화와 전문화는 무대 표현예술을 위한 각종 음향제품과 대형 프로젝션 TV 등의 첨단화된 제품 등이 출현하면서 그 변화의 속도 역시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각종 첨단제품의 출현은 여러 가지 단점도 있지만 무대 표현예술에 있어서의 경제적 효과와 이익의 다양한 실현이라는 구체적인 가능성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대 무대 표현예술의 형태적 분화와 전문화 과정 역시 문화산업이라는 큰 연결고리와 틀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당대의 무대 표현예술의 다양성 그리고 바람직한 형태적 분화라는 큰 환경변화의 틀 속에서 무대 표현예술의 바람직한 방향과 함께 다양한 역할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가무극장의 공연을 통해서는 관객들에게 편안함과 휴식제공이라는 역할을, 체육관과 같은 대형장소에서 관객들이 폭발적인 열정을 통해 카타르시스 될 수 있는 역할을, 휴양지에서는 전통 민속의 가치를 스스로 돌이켜 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는 유행을 선도하는 역할 등을 다양하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무용은 뜨거운 열정을 나타내는 온도계이며, 심령을 울리는 힘이 그 속에 있다.
                                                   - 마사 그래이엄 -

  그녀의 우리춤예술원은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단체 중에 하나이다. 그녀스스로 무용방면에서 많은 새로움을 창조해 우리춤예술원을 단순한 조직이 아닌 하나의 유기체로서 생명을 불어 넣은 사람이다. 그녀는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무용을 연구하고, 이를 유용하게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즐겨 공연을 해온 ‘살풀이’와 ‘승무’는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에 등록되어 있는 목록이기도 하다. 2005년 5-6월 그녀는 중국 중앙민족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근처 공원에 가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중국무술의 매우 다양한 동작 속에서도 가무로서 활용될 수 있는 무한한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강의는 수강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2006년 9월 중앙민족대학의 초빙교수로서 재차 임용되어 한국 전통무용을 계속 강의하는 기회를 잡기도 하였다. 그녀는 임용기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강의에 내실을 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무용과 무술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자는 그녀에게 중앙민족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어떠한 감회를 느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무대표현예술은 학술성과 실천성이 모두 중요시되는 예술학 분야이기 때문에 강의에 있어서는 이론과 실천성이 모두 요구됩니다. 무용은 심미적인 현상에 대한 일종의 창조력 배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미적 창조에 의해서 표현된 사유(思惟)와 인지능력은 본질적으로 서로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성은 특정한 소수인만의 천부적 소질이 아니라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고, 무용은 모든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심미창조능력을 개발시키는 매우 유용한 수단입니다. 무용은 음악적 감수, 신체적 율동, 리듬의 변화, 감정표현 등이 하나로 일치된 종합예술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여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 내도록 합니다. 그리고 무용의 완성은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손, 눈, 신체, 규율, 걸음걸이 등의 진행에 의한 다차원적인 조화에 의해서 달성됩니다. 이러한 정서적 조합이 대뇌를 자극하여 사람을 흥겹게 만들며, 여기에 음악적 요소가 가미되어 더욱 적극적인 상상을 촉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음악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감흥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것을 통하여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심미적 창조력을 무한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함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무용은 형체적 공간조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통해서 볼 때 무용은 조형예술과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형예술은 비교적 시각적인 효과만을 중요시 하는 반면 무용은 리듬과 선율이 하나 된 연속동작이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즉 무용은 시ㆍ공간을 모두 겸비한다는 점이 조형예술과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그녀가 말문을 열었을 때 기자는 마치 그녀의 학생이 된 듯 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중국과 서양예술 이론을 모두 꿰뚫고 있는 1세대 미학대사(美學大師)임과 동시에 중국 현대미학의 선각자로 추앙받고 있는 송백화(宋白華) 선생의 저서 ‘미학산보’(美學散步)의 한 구절을 인용 ‘무용은 최고의 운율, 리듬, 질서, 이성이며, 동시에 고도의 생명, 율동, 힘, 열정이다. 또한 무용은 모든 예술표현의 결정체이며, 우주창조 과정의 상징성이 그 안에 있다.’고 견해를 밝히기도 하면서  이는 무용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무용은 동작을 통해 사람의 내면에 숨어있는 정감을 표현하여 내는 것으로서 음악적 요인을 배경으로 사용합니다. 음악적 요인의 결합이 없다면 무용의 감동적인 효과는 그 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무용과 음악의 연계는 음악의 운율과 리듬이 무용이 본질적으로 지닌 음악적 운율성과 리듬성 등과 일치되기에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용은 일종의 동작음악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무용의 동작은 장선조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단선조에 의한 것이든 혹은 공간적, 시간적인 것이든 간에 모두 고저기복이 있으며, 이러한 고저기복은 음악의 높고 낮음과 성격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무용과 음악의 관계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관계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야 신체적 율동과 감정의 유입이 비로소 잘 표현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무용의 자태에 시적인 정서와 아름다운 화폭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1920-30년대 소련에는 梅耶荷德이라는 유명한 희극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문학예술가의 성공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 적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 작품을 보고 훌륭하다고 했다면 당신은 철저하게 실패한 것이다. 반면 만약 모든 사람이 좋지 않다고 했다면 이 또한 당연히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이러한 견해 속에서도 당신은 아직 당신만의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반향에 의한 결과로 일부에서는 당신의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게 된다. 만약 일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이 너무 싫어서 반으로 찢었다면 당신은 정말로 성공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후에 일부 사람들은 그의 견해를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여 ‘梅耶荷德의 율법’이라고도 하였지만 아무튼 梅耶荷德의 견해에 비추어 본다면 “정확한 형체 감각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의미 있는 행위이며, 창조성을 지닌 사상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는 “배우의 역할유형”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그의 이론을 설명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배우의 창작은 일종의 공간조형 형식의 창작이므로 배우는 반드시 자신의 신체 역학(力學)을 확실히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 조형술’의 이론적 기초이며 핵심 내용입니다. 이러한 이론적 기초에 근거하여 그는 “배우는 반드시 자신의 재능과 신체를 잘 훈련하여 어느 순간 외부(배우로부터 안무자에 이르기까지)로부터 받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배우의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3가지 항목을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바로 “1. 공간적 감각에 대한 능력배양, 2. 음악에 대한 본능적 애착심 향상, 자각적으로 자신을 음악가로 변모시켜야 한다. 3. 표현방법에 정통해야 한다”는 항목 등입니다.

  배우의 창작은 일종의 공간조형 형식의 창작이다. 따라서 배우는 반드시 자신의 신체 역학을 확실히 이해하여야 한다.
                                                         - 梅耶荷德

  기자의 방문취재 시, 그녀는 무용계에서 널리 상용되고 있는 술어 중에 ‘무도감’이 있는데 그 뜻은 바로 무용가의 동작언어에 대한 감각이라고 하였다. 거의 모든 무용 연습실에는 큰 거울이 있습니다. 단원들은 거울 속에서 자신을 찾게 됩니다. 그들의 관심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무자(舞姿)입니다. 자신의 용모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울을 통하여 무용자태를 자신이라는 물질적 개체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입니다. 거울의 영상을 통하여 자아를 검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하는 것은 무용자태라는 것이 본래 자신이라는 물질적 개체와 하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아검증으로부터 자아재생과 자아조정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용연습과 리허설 중에 거울의 작용을 중요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수한 배우는 일생동안 다양한 역할을 소화합니다. 다양한 풍격의 무용을 접촉하고 창작성이 완전히 다른 연출을 해야 하며, 각기 다른 형태의 관중을 만나게 됩니다. 충분한 자신감과 능력 그리고 서로 다른 풍격의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신체적 조건의 유지는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훌륭한 공연을 위한 완벽한 심리상태의 유지 혹은 신체 적응력의 유지 등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51세의 이경화 교수는 박사학위를 지닌 한국무용가이다. 그녀는 예술적 지도력과 예술발전에 기여한 무용가로서 그녀의 춤 또한 인정받아 2006년 9월 중순 한국의 대통령으로부터 무용분야의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여받았다.
  그러한 명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용단원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하는 단체입니다. 또한 자신이라는 소재를 사랑하고 중시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용단원은 결코 모두가 주연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단체무용에 있어서나 혹은 1인 무용에 있어서나 모두가 마찬가지로 부단히 요구되는 주ㆍ객관적인 조건 등을 소화해 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하나가 된 모습으로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결코 우연히 무대에서 만나서 동작을 맞추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외모 혹은 신체적 우세에 힘입어 안무가의 눈에 띄어 선택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용은 단체로 이루어지는 행위예술입니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래서 단원들 모두는 배역에 상관없이 혼신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실수가 전체의 음율감을 망쳐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용에 있어서는 주연이거나 조연이거나에 상관없이 모두 확실한 단체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나는 무대에 서있다”, “나는 공연한다”, “나는 완벽하게 공연할 것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그녀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개막식의 공개행사의 무용분야 안무 및 지도를 맡았었다. 당시 최연소 안무지도자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폐막식 공개행사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공개행사에서도 그녀는 안무 및 지도를 맡았다.
  월드컵 개막식 행사에서 이경화교수의 실제 역할은 부총괄 안무 및 지도였다. 행사의 모든 안무지도자 중에서 서열 2위였으며, 그녀가 안무 및 지도를 맡은 ‘누리북’은 월드컵 개막식에서 가장 무게가 있는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다. 국제 체육행사에서의 안무와 예술단 단장의 역할은 서로 다르다. 그녀는 예술단 안에는 전문 배우들이 있어서 그들을 지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국제적인 대형체육행사에 참여하는 단원들은 대부분 비전문적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 공개행사에서 그녀가 지도한 출연자들은 소수정원이 무용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고등학생들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폐막식 공개행사에 참여한 출연자들은 일부가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이었고 대나머지 대부분도 일반 학생들이었다. 가장 전통적이고 화려한 색체를 뽐냈던 2002년 월드컵 개막식 행사에서 그녀가 지도한 출연자들은 1,200명의 군인이었다. 1,200명의 군인을 지도하고 훈련시키는 일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 1,200명 모두를 모아 단체사진을 찍어야 한다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많은 인원인 셈이다. 하물며 그 많은 인원을, 무용에는 경험이나 지식이 전혀 없는 군인들을 그것도 남자 사병들을 3개월이란 짧은 시간 안에 교육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사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군인들이 무용에 대한 기초나 경험이 없다는 일 보다는 혹은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는 것 보다는 군인이라는 특성상 비교적 주동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 연습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병들은 명령에 의해 소집되었고, 그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으므로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그들의 생각에는 군인의 임무는 전장이나 훈련장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이지 군인이 무슨 무용? 인가 등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경화 교수는 그러한 현실적 문제 등을 먼저 자세히 파악하고 안무를 할 때 우선 간단한 동작과 재미있는 동작부터 시작하는 등 많은 배려를 하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군인들의 무용에 대한 반감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일부에서는 그녀가 가르치는 무용동작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서서히 난이도가 있는 동작을 가르쳤고 결국 짧은 시간 안에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 속에서 모든 동작을 지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3개월의 기간 동안 하루 10시간씩 가르치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이 무용가인지 아니면 군인인지를 분간 못할 정도로 일에 몰입해 있었다.
  월드컵 개막식 행사에서 단원들이었던 군인들은 그녀의 그러한 열정과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그날 연출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월드컵 이후 참여했던 군인들은 자신이 성대한 월드컵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무용을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배우의 진정한 가치와 생활은 무대 공연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그 무대에서 진실로 모든 열정을 다해 일할 때 비로소 가장 훌륭한 배우가 되는 것”이라는 점도 새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올림픽과 월드컵 그리고 아시안 게임 개ㆍ폐막식 총괄 안무 및 지도 경험과 대형 무대에서 활동한 경험, 동양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겸비 등, 그녀의 이러한 풍부한 경험과 재능이야말로 북경 올림픽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녀는 기자의 방문취재 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여 2008년 북경 올림픽 개ㆍ폐막식 행사에 공헌하고 싶다고 하였다. 2년 후 북경에서는 올림픽이 거행된다. 중국에는 대형 공연을 지도했던 안무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아시안 게임, 올림픽, 월드컵 등을 모두 안무했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녀의 경험이야말로 북경 올림픽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매우 값진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무용은 창작예술과 공연예술이 합쳐진 공연창작예술”임을 강조하였다. 즉 무용은 창작과 공연이라는 서로 다른 색체가 합쳐져서 구성된 예술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저명한 극작가이며 동시에 희극 교육가, 안무가인 양여천(阳予倩) 선생은 일찍이 “무용은 동작을 통하여 사랑과 감정을 전하는 예술이며, 움직임이 있는 조형예술이다. 배우가 표현하는 것은 고도로 집약된 인간의 감정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자를 구현한 조형예술인 조각 등은 이미 오래전에 끊어진 우리의 고대 무용예술을 부활시키는 데 있어서 새로운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무용예술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나라 시대 노래와 음악이 구분되지 않던 때부터 전통과 서양의 무대예술이 융합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용은 일관되게 일종의 종합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은 음악, 형체 그리고 안무가의 교감에 따라 새롭게 구현되고 있다. 기자는 중국의 동인(同仁)사상이 북경 올림픽이라는 국제 체육행사를 통해서 인류에 새로운 기적을 창출해 주기를 희망한다.
  2007년 한중 수교 15주년을 경축하기 위하여 이경화 교수와 중국 인민해방예술대학 유민(劉敏) 교수 등은 현재 2007년 8월 예정으로 북경행사를 준비 중에 있다.